우리는 생의 어느 시점에서인가 지독한 ‘선택의 피로’에 직면합니다. 아침에 눈을 떠 잠자리에 들기까지, 현대인은 수천 가지의 선택지 앞에 홀로 서서 최선의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립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듯 인생이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이라면, 우리는 각자가 내린 결정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진 채 고독한 사막을 횡단하는 외로운 항해사와 같습니다. 실패한 선택은 자책의 화살이 되어 돌아오고, 성공한 선택조차 다음의 더 나은 선택을 향한 불안한 징검다리가 될 뿐입니다. 이 차가운 ‘선택의 전쟁터’에서 우리는 문득 멈춰 서서 묻게 됩니다. “인생은 정말로 내가 내린 결정들의 차가운 집합에 불과한가?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무의미한 것인가?”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가장 따뜻하고도 단호한 부정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인생을 B와 D 사이의 C(Care), 즉 ‘돌봄’이라 정의해 왔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를 가만히 복기해 보십시오. 당신이 누구의 자녀로 태어날지, 어떤 시대를 살지,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몸을 가질지 스스로 선택한 적이 있습니까? 단 한 순간도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생의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무력했고, 타인의 전적인 돌봄 속에서만 비로소 생존을 허락받았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잠을 포기하고 젖을 물렸으며, 젖은 기저귀를 갈아주며 체온을 나누었고, 밤새 열이 나는 이마를 짚어주던 그 ‘조건없는 환대’가 없었다면 우리 생은 단 한 걸음도 떼지 못했을 것입니다.
프롤로그
제1장 환대 속에 눈뜨다
선택권 없는 축복: 우리가 받은 첫 번째 돌봄
'B'를 'D'로 밀어 올리는 동력, 타인의 응시
독립이라는 착각과 연약함의 긍정
제2장 선택이라는 신화
사르트르의 'C(Choice)'가 놓친 것들
무한선택의 시대, 고립된 개인의 피로
'무엇이 될 것인가'보다 '어떻게 머물 것인가'
제3장 돌봄의 철학
돌봄, 인간다움을 증명하는 가장 숭고한 노동
상호의존성: 서로의 빈 곳을 채우는 그물망
'나'를 넘어 '우리'로 확장되는 생애 주기
제4장 관계의 보수
타인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내는 힘
효율성을 이기는 '정성'이라는 시간의 마법
내가 속한 공동체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는 일
제5장 자기 돌봄
자책하는 마음을 다독이는 내면의 손길
성취보다 소중한 '존재 자체'의 보존
나를 기르는 마음: 인내심 있게 나를 기다려주기
제6장 돌봄의 노동
'Care'와 'Service'의 차이: 영혼이 깃든 노동
돌보는 이가 겪는 소진과 회복의 균형
일상 속의 작은 보살핌이 세상을 구하는 방식
제7장 공감의 공동체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상호 돌봄의 사회로
약함을 환대하는 문화가 필요한 이유
우리가 서로의 안전망이 되어준다는 것
제8장 시간의 돌봄
지나온 후회(과거의 선택)를 돌보는 법
오늘이라는 작은 정원을 가꾸는 태도
서두르지 않는 삶
제9장 상실과 애도
상실이라는 구멍을 메우는 따뜻한 기억들
마지막을 배웅하는 일의 거룩함
애도는 남겨진 이가 스스로를 돌보는 과정
제10장 평화로운 마침표
인생의 'D', 타인의 손을 잡고 건너는 강
죽음은 끝이 아니라 돌봄의 완성이다
다음 세대에게 남겨줄 '돌봄'이라는 유산
에필로그
정완(鄭浣)은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로스쿨에서의 법학강의와 더불어,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의 ‘디지털사회의 문화’ 강좌를 통하여 철학과 종교, 문화론 등을 강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추구해 왔다. 저서로 많은 법서를 출간한 외에 인문서로 ‘디지털사회의 문화’, ‘사이버엔트로피’, 시집 ‘디지털시선’, ‘디지털시선II’, ‘철학시선I’ 수필집 ‘행복의 길목’, 소설 ‘신시, 배달의 빛’, 교양서 ‘문명의 전환’, ‘정보의 덫’, ‘데이터권력’, ‘독재자평전’ 등을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