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열망해왔다.이루어진 사건들이 아니라,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이루어졌어야 할 사건들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은 이 열망과 무관하지 않다.열망의 강도는 불행과 비극의 강도에 비례한다.이미 이루어진 비극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좌(視座)의 심장에는 탄식, 회한, 열망이 뒤섞인 채 자리한다.이루어졌어야 할 세계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이루어진 세계와 이루어지지 않은 세계의 갈림길에 우리는 늘 서 있니다.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은 세계는 우리 앞에 영원히 나타나지 않는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해 뒤나미스(dynamis)와 에네르게이아(energeia)라는 말로 정리했다. 뒤나미스는 가능태(possibility) 혹은 잠재태(potentiality)로, 에네르게이아는 현실태(actuality)라는 말로 변용 가능하다.주지하다시피 '가능태/현실태'라는 말의 철학적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가능세계라는 용어를 쓴 바 있다.가능세계로부터 실현된 것이 지금 이 세계이며,신의 관점에서 최선의 세계라는 주장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신의 관점에서는 실현되지 않은 가능세계가 ‘존재’하고 있으며,인간은 신의 뜻에 의해 그 세계 속에 있지 아니 할 뿐이라는 것이다.그렇다면 이루어지지 않은 가능세계는 인간의 현실 너머에서,즉 신이 주관하는 또 다른 차원 속에서 ‘실재’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또한 신의 관점에서 이 세계가 최선의 세계라는 사실에 동의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인간은 실현되지 아니한 가능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자주 문학을 통해서 발현해왔다. 이루어진 세계와 이루어져야 할 세계의 갈림길은 늘 우리 앞에서 갈라지지만, 문학은 이루어지지 못한 세계를 늘 붙잡아두고자 했다.다시 말해 문학은 이루어지지 못한 세계, 즉 이루어져야 할 세계에 대한 열망을 오랫동안 간직해왔다. 이 책은 그 열망의 내부에 들어서는 초입에 해당한다.
제1부 ‘문(門)과 죽음’은 긴 글 ‘문 열어 보지 마라-김혜순의 「미리/귀신」으로 인한 지극히 사적인 사색’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읽은 김혜순의 시에 대한 사색을 신경과학과 휴 에버렛의 물리학인 ‘다세계 해석’의 세계관을 통해 풀어낸 글이다.
제2부 ‘시와 다세계’는 현대시의 비논리적이고 모순적인 이미지의 전개를 휴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을 통해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대시는 이미 현대 물리학이 개척한 세계를 직관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그것은 매우 ‘보르헤스’적인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제3부 ‘시와 레오모드(rheomode)’는 시의 역설이 물리학의 역설에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개진하는 동시에 물리학적 개념을 통해 시에서 형상화된 세계를 분석하고자 한 결과물이다. 인간과 세계의 본질인 레오모드(rheomode), 즉 흐름양식이라는 개념, 그리고 다니엘 올브라이트(Daniel Albright)의 파동시학(wave-poetics)을 양자시학의 틀에서 소개하고 있다. 이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제4부에 수록된 ‘시와 세월호-가능세계의 실재성,혹은 애도를 넘어서기’는 프랑스 혁명가 블랑키와 니체의 영원회귀, 라이프니츠와 들뢰즈의 가능세계 ,그리고 휴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을 통해 이 세계의 불행과 비극을 넘어서고자 하는 고투의 기록이다.
휴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은 단 하나의 세계(우주)만이 존재한다는 고전역학classic mechanics의 오래된 세계관을 균열시키고 있다.그 균열의 틈새에 보르헤스의 기묘한 표정처럼 현대시가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책 본문 소개>
어쨌든 유년 시절부터 나를 지배했던 불안. 죽음에의 불안. 이 불안에서 벗어난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불안은 죽음보다는 사라짐을 향한 불안이었다. 물론 죽음이 곧 사라짐과 같은 의미이겠으나, 내가 죽어서 사라진다는 사실에 대한 직관적 허무의 통각. 깊은 밤이면, 가끔씩 내가 사라지고 없는 텅 빈 우주가 생생하게 나를 덮쳐왔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불안은 인간에게 근원적이다. 출생과 더불어 인간은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게 되는 것이니만큼, 인간의 탄생은 불안의 정동과 분리 불가능하다. 불안의 조절과 통제는 인간의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제다. 죽음에의 불안은 개체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고 인간 문명의 발전에도 근원적인 토대가 된다. 그러나죽음에의 과도한 불안은 쓸모없는 것이다.
-본문 19-20쪽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들의 운동만이 있을 뿐. 의식의 흐름 역시 시간의 작용이 아니라, 신경전달물질의 운동이 만들어낸 현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과거‧현재‧미래는 한 덩어리의 세계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왜 현재에 갇혀 있는가? 과거는 기억하면서 왜 미래는 예측해야 하는가? 결정적으로 인간은 2초에 불과한 일상적 의식 수준의 ‘현재’에 갇힌 상태다. 현재의 인간에게 과거는 지나가버린 것이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상태다. 그렇다면 현재는 존재하는가? 2초에 해당하는 현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지고 있다. 그 실체를 잡을 수는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사라져가는 현재에 처단당한 존재다.
-본문 26쪽
신경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바위는 파리보다도 더 빠른 반응을 보인다. 바위를 치자마자 소리가 들려온다. 물리적 에너지가 변화되는 속도만큼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외부의 자극이 신경계를 관통해야 하는 파리의 반응 속도는 이보다 ‘훨씬’ 느리다. 인간의 머리를 한 대 치면 인간 역시 즉각적으로 신체적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머리를 한 대 치고 지나간 이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줄곧 생각에 잠길 것이다. 바위는 신경계가 없고 파리는 신경계가 매우 짧다. 이에 비해 인간의 신경계는 외부의 자극이 아주 오랫동안 머무는 생체기관이다./ 스피노자는 이에 대한 설명으로 감응(affec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본문 31쪽
3차원적 존재인 인간에게 현실(reality)이 될 수 없는 과거와 미래가 민코프스키의 시공간 속에서는 모두 현실에 해당한다. 미래와 더불어, 과거는 실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존재했던 인간의 몸과 자아 역시 실재하는 것인가? 테그마크를 비롯한 일부 물리학자들에 따르면 실재하며, 그 형태는 매우 복잡하다.
-본문 58쪽
지금 이곳의 나의 삶과 과거 저편 또는 무한한 평행우주 속의 나의 삶이 전혀 무관한 것이라면, 나의 삶은 어차피 결정된 무한한 삶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상관없는 것인가? 어차피 무한한 삶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그러나 런던의 물리학자 데이비드 도이치는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정확한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의미로 충만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우주 가지(branch)를 굵게 만든다”거나, “당신이 성공적인 인생을 산다면, 당신의 분신들 역시 같은 결정을 내림으로써 성공을 누린다”고 말한다.
-본문 61쪽
평행우주론자 휴 에버렛(Hugh EverettIII)은 1982년에 심장마비로 물리학자로서는 비운의 삶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그의 박사논문 「양자 역학의 상대적 상태 이론(Relative State Formulation of Quantum Mechanics)」(Princeton Univ., 1957)은 철저히 무시된 까닭에 그는 물리학계에 자리를 잡을 수 없었고 흔히 그렇듯 술과 담배로 몸을 상하게 한 끝에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평행우주를 실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평행우주가 실재한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의 물리학계에서는 허무맹랑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리학자로서의 비운은 평행우주론(다세계 해석)을 그의 박사학위 주제로 선택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본문 71쪽
휴 에버렛의 딸은 평행우주에서 아버지를 만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다른 우주에서 아버지 에버렛과 살고 있을 그녀는 자신이 다른 우주에서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데이비드 도이치는 자살의 순간 다른 우주의 그녀가 아마도 뭔가 슬프고도 불행한 느낌을 가졌으리라 말할 것이다.
-본문 83쪽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는 ‘현실태’와 한쌍을 이루는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선택된 세계와 선택되지 않은 세계를 현실태(energeia, actuality)와 가능태(dynamis, possibility, potentiality)로 명명하여 구분한다. 이 세계에서 실현된 많은 것들은 현실태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가능태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실현되지 못한 가능태는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그것은 단지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무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해왔으나, 휴 에버렛에 의해 물리적 실재로 격상된다. 즉 다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수많은 다세계 속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세계를 살아가지만, 실현되지 못한 가능태의 세계는 무한한 다세계 속에 물리적으로 실재하게 된다는 사실을 휴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은 선포하고 있다.
-본문 88쪽
현재주의(presentism)는 시간의 본질에 대한 3차원적 관점의 이론이고 영원주의(eternalism)는 4차원적 관점의 이론이다. 현재주의는 오직 ‘현재’만을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과거는 한때 존재했던 세계의 형상이고,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세계의 형상이다. 영원주의는 현재주의와는 전혀 다르게 과거와 미래를 현재와 똑같이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처럼 실재하는 것이다.
-본문 144쪽
인간은 현재만을 살아간다. 달리 말하면, ‘현재’에 감금되어 있다. 인간이 이미 확정되어버린 과거는 ‘기억’하고 현재는 ‘지각’할 수 있는 반면에, 미래를 전혀 모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신경계가 3차원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은 선형적(linear)이다. 인간의 의식 자체가 ‘과거→미래→현재’라는 시간순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은 3차원적 공간처럼 ‘현재’를 벗어날 수 없다. 시간의 축을 따라 과거로 되돌아가거나 미래로 앞질러 갈 수 없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존재했고, 미래도 ‘이미’ 존재한다. 세계라는 ‘유체’ 속에서 인간의 의식은 오로지 ‘현재’라는 한 지점만을 차지할 수 있을 뿐이지만, 인간이 지각하는 ‘현재’ 이외의 세계는 실재한다. 우리 눈에 보이거나 지각되는 세계만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없는’ 세계로 가득하다.
-본문 184-185쪽
다니엘 올브라이트(Daniel Albright)의 ‘양자 시학(Quantum Poetics)’에 따르면 시의 언어는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지닌다. 언어의 입자성으로 기우는 입자 시학(particle poetics)은 언어의 의미들과 이미지들을 구분하고 그 경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언어의 의미뿐만 아니라 이미지가 원자, 분자, 결정(crystal)으로 진행함으로써 더 큰 의미와 이미지 체계로 조직되는 위계적인 구조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언어의 파동성으로 기우는 파동 시학(wave poetics)은 언어의 의미 그 자체에 구속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시인과 독자를 하나로 이어주는 파동의 감응적 흐름(telepathic stream)이다.
-본문 196-197쪽
칸토어는 연속체 가설이 참임을 증명한 후 다시 거짓임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반복한 끝에 정신병에 시달린다. 크로네커의 박해에 따른 개인적인 불행도 큰 원인이 되었겠으나, 연속체 가설에 몰두했던 체르멜로(Ernst Zermelo), 괴델(Kurt Gödel), 에밀 포스트(Emil Post) 등도 정신분열에 시달렸다는 점을 환기해본다면, 기호체계를 공허하게 만드는 역설이 정신병과도 일정한 관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연속체 가설을 둘러싼 수학자들의 고통은 공리 체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현재의 집합론 공리체계에 깃든 공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로인해 발생하는 역설에 고통당할 수밖에 없었다.
-본문 235쪽
생명이란 무엇인가. 1944년 물리학자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는 이 주제로 강연을 한다. 이 강연 내용의 핵심은 엔트로피의 법칙을 거슬러 부엔트로피(negentropy)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생명이 출현한다는 사실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자연계의 엔트로피는 감소할 수 없고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생명은 열역학 제2법칙을 거슬러 부엔트로피(질서도)를 만들어내는 과정, 즉 엔트로피(무질서도)의 증대를 거스르는 힘으로부터 생성된다. 엔트로피가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부엔트로피는 질서를 생성해낸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떤 질서를 유지하는 체계다. 그러나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내부의 무언가가 끊임없이 파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본문 301쪽
2014년 4월 6일, 그것은 무한히 반복되는 생생한 삶이고 죽음이다. 그것은 ‘천 번째’를 넘어 무한히 반복된다. 그리고 그 반복은 차이를 지닌 반복이다. 차이를 지닌 반복 속에서 그날의 아이들이 모두 살아 있는 현실이 영원회귀하는 것이다. 다만 ‘지금’의 우리는 그 반복의 움직임을 따라 흘러가는 3차원 속에 감금되어 있을 뿐이므로 회귀하는 그 세계를 볼 수 없고 그 세계 속에서 살아있을 ‘너’를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회귀’의 무한한 우주 속에서 ‘너’는 살아있다!
-본문 363쪽
‘너는 항상 엄마랑 같이 있어. 내 가슴속에 묻었으니까. 엄마랑 같이 가자, 죽을 때까지…’
생각은 그렇게 하는데도 또 헤매면서 찾고 있어요. 왜 없을까…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데…그런데 어디를 가도 없어요…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창비, 2019, 25쪽.)
영원회귀의 무한한 순간마다 ‘너’는 살아있으나, 지금 여기의 ‘나’는 ‘너’를 볼 수 없다. 블랑키는 말한다. “천체에 의한 인간의 영원은 정말 우울하다. 냉혹한 공간의 장벽으로 인해 형제 세계(brother-worlds)와의 갈라짐이 더욱 슬픈 것이다. 너무나 많은 동일한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조차 모른 채 지나간다. 아니, 정말 그렇지는 않다. 이 공유된 존재(shared existence)는 마침내 19세기에 발견되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믿을 것인가?” 블랑키의 우울은 영원회귀 속에 수많은 ‘나’와 ‘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모른 채 지나간다는 사실에 있다. 더 큰 우울은 영원회귀 속에 무한히 존재하는 동일한 존재들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 그것은 상상의 믿음이 아니라 물리학적 실재에 대한 믿음이다. 블랑키와 더불어 니체는 그 자신의 ‘영원회귀’에 근거가 될 만한 물리학을 찾아 이용하려 했으나, 19세기 중후반의 물리학은 근거가 되어주기에 너무 빈약했다. 영원회귀를 향한 철학자의 심오한 직관을 좇아가기엔 더욱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영원회귀의 사유는 고대 그리스의 우주관까지 거슬러갈 정도로 오래된 것이지만 물리학의 이론적 토대가 이들의 우주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본문 364-365쪽
제1부 문門과 죽음
문 열어 보지 마라: 김혜순의 「미리/귀신」으로 인한 지극히 사적인 사색
제2부 시와 다세계(Many Worlds)
휴 에버렛과 시의 주체에 대한 단상
시와 다세계(Many Worlds): 실재로서의 가능세계와의 시적 동맹
탈에고화된 주체의 거대한 성좌: 서대경의 <굴뚝의 기사>에 대하여
소진된 인간,이후의 시인:김석영의 시에 대하여
제3부 시와 레오모드(rheomode)
시와 물리학의 역설: 세계의 너머와 주체의 확장
불확정성uncertainty의 시학: 포레스쿠의 이중성의 의미에 대하여
유체(流體)로서의 세계와 레오모드rheomode의 언어
파동,파도,Wave,그리고 랩의 시학: 김세윤 시집 <래퍼의 노래>
김언 함수(函數)론: 미분과 적분의 시적 체계
[보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김언 시집 <백지에게>
공기와 장미,그리고 시인: 내재성의 시에 대하여-박춘석 시집 <장미의 은하>
세계의 가산(加算)과 정서의 물리학적 환원: 김미령 시집 <우리가 동시에 여기 있다는 소문>
생명의 흐름과 엔트로피: 송기원의 「회복기의 노래」에 대하여
제4부 시와 가능세계
시인,전락(顚落)한 예수,혹은 은밀한 묵계: 위선환의 「순례의 해」에 대하여
시와 세월호: 가능세계의 실재성,혹은 애도를 넘어서기
발표 지면
인명 찾아보기
용어 찾아보기
문학평론가. 부산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박사과정을 마쳤다.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실존적 헤르메스의 탄생-진이정의 시세계'가 당선되었다. <오늘의 문예비평> 편집 위원, <작가와사회> 편집 위원과 편집 주간으로 활동했으며, 동아대, 경성대, 부경대, 인제대 등에서 강의했다. 한국 사회 전반에 작동하는 정동을 눈여겨보고 있으며, 특히 경제민주화와 죽음충동의 역학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 근대화 과정을 천착하는 데 많은 관심이 있다. 저서로 <헤르메스의 악몽>, <닿을 수 없는 혁명>, <우울한 것의 추락>, <혁명과 죽음>, <황홀한 아파니시스> 등이 있고, 공저로는 <다시 새로워지는 신동엽>, <2000년대 한국문학의 징후들>, <문학과 문화, 디지털을 만나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비평의 비평들>, <한국문학의 중심과 주변의 사상>, <(불가능한) 대화들> 등이 있다.